<이후 / aftermath>

지알원

이번 시리즈는 미술의 특정재료가 소진된 이후의 남겨진 흔적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. 입주해 있는 레지던시에서 옆 스튜디오 작가의 재료(나무합판)가 소진되고 버려지는 순간을 지켜보며, 그 소모된 재료의 남겨진 부분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. 나무 합판은 주된 목적이 사라진 뒤 작고 우연한 형태로 남겨졌고, 나는 그 형태에 어떠한 변주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.

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맥락 속 사건이나 충돌 이후에 남겨진 흔적들을 물리적인 형태로 바라보는 시각이다. 주된 사건과 이야기가 끝난 후 주변부에 흩어지는 것들은 대부분 소외된 존재로 남게 되지만, 그것들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이야기의 조각들이다. 남겨지고 버려진 나무 조각들은 그 과정 속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미완의 공간으로 다가온다. 그리고 그 위에 스프레이 컬러를 덧입히며 그래피티(문화)적 흔적을 남긴다. 이 흔적은 무언가를 추가하거나 변형하기 위한 것이 아닌, 사건의 여운과 유기된 흔적들이 더해져 또 다른 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. 도시 속 거리의 유기된 공간에서 시작된 그래피티처럼, 소외된 것에 새로운 시선을 부여하고 사라질 뻔한 이야기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. 작업은 주변의 잔여물과 사건의 여파가 어떻게 새로운 시각적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.
한편, 중요한 것은 이 재료들이 우연한 형태로 남겨졌다는 사실이다. 나는 그 형태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다. 형태 자체가 말하는 방식을 존중하며, 그 위에 덧붙여진 문화적 흔적은 이야기를 강조하는 장치로만 작동한다. 주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유기된 흔적들 속에는 여전히 확장 가능성이 존재하며, 그들은 변주되지 않은 채로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줄 수 있다.

<이후>시리즈는 주목받지 못한 파편들이 지닌 미완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다. 사건의 흔적이 지워진 자리에 무작위로 남겨진 조각들은,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가 아닌 또 다른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. 특정 사건이나 충돌 이후의 존재들을 다시보고, 그 속에 담긴 잠재적인 이야기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고자 한다.

2024